우리 현대사에서 비록 독립운동가 출신 이승만이 집권하긴 했지만 왜 임시정부의 독립군 세력이 완전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는지 통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의 일단을 설명하자면, 결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의 무능이나 부패가 대단히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교과서적인 것들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었다.
일단 극심한 그들의 분열상이 그랬다.
강준만의 인물과 사상 2004년 3월호 124페이지에서 "이미 1920년대에 상해 임정에는 27개의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여 최악의 분파주의를 노정했던 바, "한국인"이란 말은 심지어 국제사회주의운동 세력들 사이에서조차 "파벌주의"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고 있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고 한다.
임정 세력은 파벌에 따라 극도로 분열해 있었으며 이래서는 도저히 민중의 지지를 얻는 정치 세력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점은 장준하의 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장준하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경의 임정을 찾아 간다.
그러나 거기서 발견한 극도의 분열과 나태에 고통스러워하다 독립투사 선배들에게 이렇게 폭언까지 했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다. 일군에 가면 항공대에 들어가 중경폭격을 다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오지 않고 보지 않았으면 존경할 수 있었을 것이고 독립운동가들에게 폭격을 하고 싶다니.
장준하의 고뇌가 단순한 일시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해방 후 국내로 돌아 온 임정 요인들의 생활 태도였다.
그들은 결코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강준만의 같은 책에서 재인용한 장준하의 말이다.
"... 민중은 굶주리고 있는데, 독립투사라는 사람들이 국내 제일의 요정인 명월관에서 산해진미와 기녀들에 휩싸여 흥청망청하는 와중에 기녀들의 이마에 여기 저기서 지폐가 붙여지는 것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장준하는 훗날 이때를 이렇게 술회하였다.
"이런 식의 초대 향응이 매일 매야 바뀌는 명목들로 벌어졌다. 누구누구를 초대하든 같은 명월관이나 국일관 등 주지육림속에서 놀아나며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었다. 요릿집 경기는 장안을 누르고 해방된 기쁨이라고 사회와 인심은 둥둥 들떠 있었다."
독립투사라는 사람들이 보상욕구로 허구헌 날 기녀들을 끼고 앉아 그 이마에 지폐를 붙여 주며 노는 일이 매일같이 이어졌던 것이다. 독립운동이 무슨 특권인가.
지 아무리 독립운동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래서는 민중이 결코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럼 결과적으로 이 당시 정권을 잡게 되었던 박정희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정말로 대조적인 인품을 보이고 있었다.
진정 깨끗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다.
다음은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제155페이지에서 그가 집권할 수 있었던 인물적 배경을 분석한 대목의 일부이다. 전인권의 이 책은 박정희를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접근한 것으로 매우 중립적인 책이다.
박정희는 매우 청렴했다. ...박정희는 그렇게 생긴 돈을 독식하지 않았고, 전체 액수를 공개한 후 부하들과 공평하게 나누거나 가난한 장교들을 위해 더 많이 분배했다. 박정희는 금전 문제에 있어 자신이 상관이라는 이유로 결코 유리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리한 경우를 말 없이 감수했다.... 박정희의 가난은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1954년 2군단장 시절 하루는 군단 휼병참모가 찾아와 "박장군은 청빈한 것이 지나쳐 가족들이 아직 셋방살이를 하며 생계가 어려운 때도 있다"고 하며, "아무리 전쟁에 피해가 많고 모든 국민이 빈한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장군이 있을 집 한 칸이 없어서야 되겠는가?"하면서 선처를 호소할 정도였다...
박정희는 별을 달고 장군이 된 이후에도 극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 그로 인해 육영수 여사나 그의 부하들이 오히려 너무 괴로울 지경이었고 군단의 휼병참모(가난한 병사를 살피는 참모)까지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반혁명분자로 찍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미국으로 쫒겨간 인물이니 박정희에 대해 결코 쓸데 없이 좋은 말을 해 줄 이유가 없는 거다. 저 말은 사실로 봐야 한다.
박정희의 이런 청빈한 성정은 그의 타고난 성품이다. 그는 결코 사치나 낭비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죽고 나온 것도 낡은 시계와 헐어 빠진 혁대였다.
박정희의 집권 전 이런 청빈 강직한 모습은 이상우의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상우는 목포출신이며 박정희 정권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로서 역시 박정희에게 비호의적인 인물이다.
"... 군 장성들 사이에서 박정희는 경원의 대상이었다. 함께 어울려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청렴과 강직함으로 말미암아 어딘가 범접하기 어려운 그런 특별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박정희가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는 의외로 그를 도우려는 사람이 많이 나왔었다."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 인품에 대한 기본적이 팩트이다.
요새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친인척 비리도 어마어마했다는 개소리도 있다.
인터넷에 퍼져 있는 지 멋대로의 거짓말들 때문이다. 친인척에 대해서도 그런 말들이 있다.
박정희 까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강준만이 박정희 친인척 관리에 대해 쓴 글을 좀 보자. (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권)
...친인척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박정희는 확실하게 맺고 끊는 자세를 취했다. 박정희의 친인척 특혜는 없었다. 박정희는 친인척을 너무 냉정히 대하고 오히려 박대하는 바람에 그들로부터 원망을 들었다.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는 516때 66세였다. 그는 박정희 이상으로 엄격하게 선을 그어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중에(65년) 한국전력의 연차적 계획에 따라 자기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마저 행여 특혜시비가 일까봐 단호히 반대했다. 급기야 한전 사장이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고 나서야 전기공사를 받아들였다.
강준만이 쓴 글이라 믿기 힘들겠지만, 강준만도 이 점은 인정한다. 여러 자료를 인용한 것이지만 객관성이 있으니 그가 이렇게 쓴 것이다.
결론적으로 해방 직후 박정희의 집권은 그의 인물됨됨이도 그러했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의 무능과 부패도 또한 함께 작용했다. 독립운동가들을 폄훼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들이 집권하지 못한 것이 마치 친일파들의 악행탓인양 떠드는 것도 결코 옳지 못하다.
정권은 민중의 지지를 얻을 만한, 정권을 잡을 만한 사람이 잡는 것이다.
박정희는 주위의 신망을 크게 받는 청렴 강직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국민은 박정희를 선택했고,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최고의 지지율을 보내고 있다.
그 당시를 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저 컴퓨터 앞에 낄낄거리며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 건설사를 조롱하고 앉은 꼴은 그저 가당치도 않다.
박정희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로 거론조차 되지 않은 인물이다.
그저 아무런 근거 없이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둥 개소리를 하면서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 건설사를 쓰레기통에 처박고 있으니 웃기지도 않는 모습들이다.